
낭만의 좌표
작가는 1차 대전 직후 1920년대의 미국을 동서로 나누고, 낭만의 서부와 타락의 동부로 상징성을 부여했다. 서부는 주요 등장인물들의 고향으로서 인간적인 삶이 남아있는 낭만의 요람으로, 동부는 물질적 풍요 속에 삭막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보금자리로 묘사된다.
좌표처럼 딱 떨어지는 이러한 상징적 구분은 소설의 배경인 웨스트에그와 이스트에그에서도 드러난다. 같은 동부이지만 웨스트에그는 그나마 이스트에그보다 지리적으로도 상징적으로도 서부에 가까워 보인다(가상의 지명인 만큼 그 대비가 선명하다). 10점 만점으로 낭만의 수치를 책정한다면 주인공들의 고향인 서부가 10점이고 웨스트에그가 2점, 이스트에그가 0점쯤 되지 않을까. 웨스트에그에 살고 있는 개츠비는 0점을 향해 거세게 흐르는 탈낭만의 격류 속에서 자신이 쥐고 있는 2점짜리 낭만의 조각을 간신히 부여잡고 있는 것 같다.
이 소설을 전후 미국의 윤리적, 도덕적 타락에 대한 고발로 해설하는 평론이 다수인 것 같지만 위와 같은 동서의 갈등구조를 단순히 윤리와 도덕의 문제로 치환하는 것은 너무 평면적인 요약으로 보인다.
서부가 낭만을 상징한다는 것은 비교적 해득하기 쉬운 반면 동부가 상징하는 '낭만의 대척점'은 하나로 모이지 않는다. 윤리와 도덕의 부재, 감성을 배제한 합리주의, 생계로 대표되는 현실의 냉혹함, 산업화와 자본주의의 부작용, 전통적 공동체를 벗어난 현대인의 고독 등 그 어느것도 동부, 즉 '탈낭만'의 상징과는 딱 들어맞지는 않는다. 동부가 상징하는 바가 무엇이냐는 물음에는 대답이 쉽지 않지만 '공허'라는 표현이 가장 적절해 보인다. 어쩌면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렵다는 것 자체가 공허의 특징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동부 사람들도 안갯속을 헤매듯 방황을 하는 것이 아닐까.
불가역적인 공허
개츠비의 삶은 비이성적이다. 5년 전 보잘것 없던 시절 짧게 정을 나누었던 상류층의 여자를 잊지 못하고 오로지 그녀에게 보여주기 위해 자수성가(밀주 유통 등 불법적으로 축재할 한 것으로 보이지만)하여 대저택을 사들였으며 어마어마한 파티를 매일같이 주관하는 등 치밀한 계획을 세운 끝에 화려하게 귀환하지만 결국 현실의 벽을 넘지 못하고 비극적인 죽음을 맞는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등장인물 중에 무언가 계획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개츠비뿐이다. 개츠비는 목적을 위해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유일한 사람이고 그 외의 인물들은 아무런 목적 없이 방황하며 항상 술에 취한 것처럼 몽롱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피해의식을 덮기 위해 흥청망청 돈을 쓰고 치정이나 일삼다가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한 개츠비가 처음부터 끝까지 맨정신이었던 유일한 사람이라는 점에서 동부로 대표되는 당시 사회의 부조리가 역설적으로 부각된다.
물론 맨정신이었을 뿐 그도 시대적 한계를 극복하지는 못했다. 시류에 저항하기는 했지만 끝내 이겨내지는 못한 것이다. 개인적인 성향과 능력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개츠비의 비극, 즉 출신의 비천함, 연인과의 이별, 이어질 수 없는 사랑 등은 그 귀책사유를 다른 누구에게 돌리기 어려운 운명적 불운이기 때문이다. 문제의 원흉인 적(敵)이 없다면 격정을 발휘되지 않고 격정 없이는 시류를 이겨내기 어렵다. 몽테크리스토 백작이 초인적인 면모를 보이며 복수극을 펼칠 수 있는 것은 격정 덕분인데 개츠비에게는 복수의 대상조차 없었다. 애초부터 서사 자체에 공허한 결말이 내재되어 있었던 셈이다.
오늘 지금 우리는
서부와 동부, 즉 좌우라는 공간적 상징은 그 대비가 선명히 드러나지만 상류층과 하류층, 즉 상하의 신분적 상징은 유심히 살펴보아야 발견할 수 있다. 소설에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사람(개츠비, 머틀 윌슨, 조지 윌슨)은 모두 하류층 출신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하류층 출신 개츠비는 서부에서 동부로 이주해서 상류층으로 편입했지만 처음부터 동부에서 살고 있던 윌슨 부부는 끝내 하류층에 머무른 채 최후를 맞았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비극적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이 출신이 모두 하류층이라는 사실은 결국 낭만의 유무(동vs서)가 삶의 양식에 영향을 미칠지언정 "죽느냐 사느냐"라는 실존적 문제를 결정짓지는 못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죽는지 사는지는 사회적 계층(상vs하)이 결정한다는 뜻이다. 좀더 와닿게 이야기하자면 이렇다. 서울에서 태어났든 지방에서 태어났든 모두 서울로 모인다. 서울에서 금수저는 살아남고 흙수저는 죽는다. 사실 여부를 떠나 섬뜩하다.
오늘 우리가 서울에 모이는 것은 생계를 위해서이지만 이 소설에서 등장인물들이 동부에 모이는 이유는 약간 불명확하다. 윌슨 부부 같은 토박이들을 제외하면 모두 금수저이므로 밥벌이를 위해 동부에 갈 이유는 없어 보인다. 이들은 왜 가슴 속으로 서부를 동경하면서도 굳이 동쪽에 간 것일까. 작가는 이 소설의 배경인 1차대전 직후 1920년대 미국을 "재즈의 시대"로 명명했는데, 그 시절에는 탈낭만 자체가 일종의 낭만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낭만을 위해 낭만을 버렸던 것이다. "오늘 지금 우리의 시대"에는 과연 무엇이 낭만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지 자문해 보지만 쉽게 답이 보이지는 않는다.
태그 : 위대한개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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