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실격





(줄거리가 포함되어 있음)


 누군가의 좌절이 서사가 되려면 그 좌절에 그럴 듯한 이유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직접 경험하지 않은 독자도 합리적 추론과 감정의 보편성에 힘입어 그 좌절에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복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수려한 외모에 남다른 재치까지 갖추어 주변의 관심과 애정을 받으며 자란 주인공이 정신병 수준의 인간 혐오에 빠져 무기력한 식객으로 전전하다가 약물 중독과 자살시도에 이른다는 '인간실격'의 줄거리는 충분한 좌절의 동기를 담고 있지 않다. 다 가진 사람의 좌절은 드물 뿐만 아니라 철모르는 투정으로 오해되기 쉽기에 동기의 결여는 치명적이다.

 주인공 요조는 요즘 말로 '설명충'처럼 한시도 쉬지 않고 자신의 내면을 구술한다. 폭포처럼 쏟아지는 감정의 과잉 때문에 요조의 좌절은 언뜻 보기에는 극적이고 장엄하고 미적이고 상징적이라고 느껴질 수 있으나 찬찬히 들여다 보면 결국 껍데기만 요란할 뿐 얘가 도대체 왜 이러는 건지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좌절의 동기를 굳이 탐색해 보자면 주인공 자신의 성격 때문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모든 갈등의 근원은 인간을 불신하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존재로 바라보는 주인공의 인간관이다. 그렇다면 주인공은 왜 사람을 싫어하게 된 것일까? 혹자는 심약한 주인공이 인간의 위선과 가식을 끝내 이해하지 못한 결과라고 하고 또 그런 해석이 주류로 보이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주인공의 인간 혐오는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선천적 기질일 가능성이 높다.

 물론 등장인물 중에는 주인공의 그러한 선천적 기질을 발전시키는 데에 결정적 기여를 한 것으로 의심되는 자들이 있다. 어린 시절 주인공에게 성적인 학대를 가했다는 하인 남녀, 그리고 세속적인 소인배의 전형을 보여주는 넙치 정도가 그러한 혐의자들일 것이다(후반에 등장해서 주인공 아내를 강간한 침입자는 이미 형성된 주인공의 내면에 충격을 주었을 뿐이므로 논외로 한다). 하지만 이 자들의 기여는 말 그대로 기여일 뿐이고, 주인공이 아닌 일반적인 정신의 소유자까지 타락시켜 염세와 혐오의 신봉자로 만들만 한 수준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등장인물 대부분은 선한 사람들이고, 누군가의 인간관 자체를 근본적으로 뒤흔들 만큼 극도로 악한 사람은 거의 없다. 주인공이 기둥서방으로 신세지며 거쳐간 수많은 여인들의 헌신과 사랑을 보라. 오히려 숭고한 모성애가 연상될 정도이다.

 결국 주인공을 무너뜨린 것은 주변인들의 위선과 가식이 아니다. 주인공이 무너진 것은, 본인의 타고난 인간 혐오 기질이 때마침 일본을 강타한 집단적 공황과 조우하면서 비극적인 시너지 효과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주인공을 천천히 어둠으로 몰아넣은 것은 당시 패전국의 젊은이들이 공유하고 있던 무기력증일 것이다.

 이와 같이 '시대'라는 결정적인 좌절의 동기는 작가의 생애와 집필 시점 등을 고려할 때 어렵지 않게 추론되지만 정작 소설 내적으로는 확인되지 않는다. 소설 밖으로 눈을 돌려 소설이 쓰여진 시기와 배경을 확인하기 전에는 캐릭터를 이해할 수 없도록 쓰여진 것이다. 작가가 명확한 의도를 가지고 일부러 시대로부터의 단절을 도모한 것인지, 아니면 자전적 소설임을 과도하게 드러내고 싶지 않다는 무의식의 발현인지는 불분명하다. 아마 후자가 아닐까.

 일본의 전후 세대가 이 소설에 열광했던 까닭은 당시에는 이와 같은 외부적 정보가 사회 전반에 충분히 공유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작품 내적으로 결핍되어 있는 서사적 보편성을 시대적 상황이라는 작품 외적 요소가 보충해 주고 있었던 셈이다. 작품이 오랫동안 생명력을 유지하려면 그와 같은 작품 외적 요소를 연상시킬 수 있는 최소한의 장치가 작품 내부에 존재해야 한다. 이 소설은 그런 장치가 부족하고, 그렇기 때문에 오늘 여기에서 이 소설을 읽고 있는 나는 주인공의 비극에 공감을 하기 어렵다.

 면밀히 관찰해 보면 주인공은 아주 교묘하게 스스로를 변호하고 있고 그러한 태도는 더욱 공감 의지를 떨어뜨린다. "부끄러움이 많은 생애를 살아왔습니다" 라는 이 소설의 유명한 첫문장은 실은 거짓된 참회임이 분명하다. 주인공은 인간을 혐오하고 있는데, 인간을 혐오하는 자가 스스로 인간 실격임을 자백하는 것이 어떻게 참회가 될 수 있는가. 이러한 자백은 오히려 비틀린 선민의식의 표출이다. 주인공은 매우 조용하지만 강렬하게, 자신이 혐오스러운 인간과는 다른 어떤 존재라고 소리치고 있는 것이다.

 부끄럽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주인공은 자기 혐오를 가장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자기애(혹은 자기연민)로 가득하다. 자전적 소설인 이 작품은 역설적으로 주체할 수 없는 자기애를 표출하기 위해 쓰여진 것 아닐까. 작품에 희미하게 투영된 주인공의 자기애는 작가의 무의식에 감추어져 있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드러난 것 아닐까.

 형식면에서도 아쉬운 점이 있다. 이 소설은 대부분 주인공의 1인칭 시점으로 서술된다. 그런데 주인공과 같은 기인(畸人)형 캐릭터가 직접 자신의 내면을 묘사하며 이야기를 풀어 나가면 중2병 걸린 사람의 유치한 일기장이 되기 쉽다. 내면의 어둠과 고뇌는 본인이 직설적으로 설명하는 것보다 외부인이 관찰한 바를 간접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일 수 있다. 주인공이 의탁했던 여자들이 다양한 관점에서 돌아가며 주인공을 묘사했다면 어땠을까 싶다. 

 가장 인상 깊었던 캐릭터는 잠깐 스치듯 등장한 다케이치라는 아이였다. 동급생인 다케이치는 주인공의 가면을 꿰뚫어 본 유일한 인물이다. 체육 시간에 일부러 실수를 해서 주변의 관심을 끄는 주인공에게 다케이치는 슬쩍 "부러 그랬지?" 라는 한마디를 던졌고 그 한마디는 주인공의 세계를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주인공의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되었음이 분명한 그 한마디는 언뜻 보면 파멸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였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누군가가 자신의 내면을 간파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그 어린 시절부터 깨우치지 못했다면, 좀 더 나이를 먹고 "부러 그랬지?" 라는 말을 들었다면, 주인공의 삶은 훨씬 더 고통스러웠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한마디가 오히려 구원은 아니었을까. 진실은 우리를 구원하지만 정작 구원받은 자는 구원받았다는 것을 알기 어렵다. 인간이 언제나 거짓의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이유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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