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황제를 위하여 리뷰



 
 재미는 소설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이 소설은 재미있다. 격동기에 한반도와 만주를 종횡하는 주인공의 일대기를 때로는 과감히 생략하기도 하고 때로는 실시간으로 묘사하기도 하면서 생동감 있게 보여준다. 

 이 소설은 정감록과 아큐정전의 퓨전이다. 주인공 "황제"에게 아큐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일생에 걸쳐 이루어지는 일련의 정신승리가 단순히 노예근성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황제는 본인에게 천명이 있다는 믿음과 시대착오적 망상에 사로잡힌 나머지, 무모하다기보다 차라리 익살스러운 패도(覇道)에 나선다. 그는 끝내 실패한 광인으로서 생을 마감하지만, 그가 명석했으며 풍채가 남달랐던 것은 사실이다. 무엇보다 황제의 강한 신념과 열정은, 비록 그것이 본인의 번번한 좌절을 정신승리로 승화시킨 결정적 이유이기는 하나, 동시에 그를 아큐와 같은 평범한 실패자 무리와 명백히 구분해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적어도 그는 본인의 대망을 포기하지 않았고 시종일관 진지한 자세로 힘을 다해 쫓았다. 

 작중 화자는 일관된 어조로 황제를 옹호하고 때로는 동정하며 그 과오를 변명해준다. 어째서 화자가 그러한 태도를 지니게 되었는지는 도입부에 충분히 설명이 되어 있지 않은 관계로 잘 이해가 되지 않는데, 이 소설에서 굳이 아쉬웠던 부분을 꼽자면 나는 이 점을 들겠다. 반어적 유희와 풍자를 위해서 화자에게 그러한 입장을 취하도록 한 작가의 의도는 대충 파악이 되지만, 어째서 이런 기술적인 의문을 남겨두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림에 비해 액자의 비중이 현저히 적은 액자식 소설에서, 그림도 아닌 액자에 약간의 먼지가 묻어 있다고 해서 별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그러한 작중 화자의 태도에 쉽게 공감이 간다는 사실이다. 황제는 미워할 수 없는 캐릭터이다. 황제의 일생은 곧 이 땅의 가장 아픈 역사를 압축해 놓은 것과 같다. 이조(李朝)의 말기에 태어나 을사조약 겪으며 본인의 사명을 다지게 된 그는 일제강점기 하에 청년시절을 보내고, 독립군의 무장 게릴라 활동이 이루어지던 만주에서 장년을 맞이하며 드디어 조촐한대로 개국(開國)을 하기에 이른다. 황제의 기구한 여정은 그 흥망과 맞물려 또다시 폭풍전야 같은 해방공간으로 이어지고, 뒤이어 불타오르는 이념대립 속에 그는 사랑했던 황후를 잃을 뿐만 아니라 태자로 봉해진 아들과도 영영 헤어지게 된다. 6.25 동란 속에서는 마침내 남과 북을 모두 꾸짖으며 제갈량처럼 천하의 삼분을 선언하지만, 여지없이 그 의지와 정력만 상했을 뿐이다. 군사독재에 뒤따른 민주화의 열기를 저 멀리서 원통함과 무기력 속에 지켜보기만 할 때 그제서야 그는 스스로가 돌이킬 수 없이 늙었음을 깨닫는다. 황제는 입버릇처럼 스스로를 높이고 귀하게 여기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눈물겨운 우리 근현대사를 최전선에서 참고 견딘 산증인이다. 황제를 하나의 상징으로 이해할 때, 그에 대한 애틋한 시선은 곧 그 시기를 살아낸 민초들을 향한 것이 된다. 다른 등장인물과 달리 성이 정씨라는 것 외에 끝내 황제의 이름이 언급되지 아니한 것도 그의 상징성을 강조하는 하나의 장치가 아닐까 싶다. 

 말년에 황제는 대업을 포기하면서도 쫓기듯 도가(道家)에 귀의함으로써 정신승리의 정수를 보여준다. 황제의 매력 때문인지 아니면 거기서 어떤 씁쓸한 동질감을 느껴서였는지, 필사적으로 한가닥 명분과 변명에 매달리는 그 모습이 비겁하다거나 졸렬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앞선 것은 공감과 동정이었다. 상선약수와 무위자연을 읊으며 지친 육신과 마음을 어루만지는 모습을 비웃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시대적 폭력과 부조리를 반드시 자발적이라고 할 수 없는 초연함으로 도인처럼 웃어넘겨야만 했던, 굶주림과 생활고 속에서 뒤틀린 도가적 여유가 아니면 딱히 하소연 할 곳조차 없었던 민족의 슬픈 노장사상(老壯思想)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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