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내 삶의 질을 대폭 상승시킨 두 아이템 일상

1. 65인치 티비


서재와 리클라이너만 있는 미니멀 자취방을 꿈꿔왔으나 동기 형 집들이를 가서 느끼고 말았다 4k 걸그룹 직캠과 넷플릭스의 위대함을



2. 골무


이게 없으면 살 수 없는 몸이 되었다


헌법재판의 안개 사회

안개의 달콤함

 군주정과 공화정 사이에는 언제나  투쟁의 시대가 있었다. 안타깝게도 해방 전까지 우리가 치른 투쟁은 공화정을 위한 것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해방과 함께 덜 자란 몸으로 민주주의라는 옷을 입어야만 했다.

 그 상황에서 대의제는 필수적인 것이었지만 그렇다고 제 기능을 할 수도 없었다. 해방공간의 정치적 과잉 때문에 대의의 객체(시민)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대의의 주체(대표자)들이 생겨나는 기형이 발생했다. 그렇게 우후죽순처럼 나타난 무슨무슨 지도자들은 아무에게도 맞지 않는 커다란 옷을 두고 그 색깔을 무엇으로 칠할지 다툴 뿐이었다. 그로부터 60년이 지난 지금도 대의제 민주주의의 정착은 머나먼 꿈이다. 옷의 품은 아직도 크고 거듭 덧칠한 색은 때얼룩이 되었다.

 물론 그 짧은 시간 동안 이룩한 정치적 성장은 상당히 급진적인 것이었다. 일제에 나랏님을 잃었을 때 머리를 찧고 눈물 흘리던 사람들이 고작 한 세대 만에 국가원수를 조롱할 수 있게 되었다.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헌법재판도 그 중 하나라는 건 분명하다. 다른 나라가 시행착오와 유혈사태를 겪으며 이룩한 정치적 발육을 헌법재판이라는 영양제를 통해 비교적 단기간에 이루어냈다. 헌법재판이 없었다면 여기까지 오는 데 수십 년은 더 걸렸을 것이다.

 헌법재판소는 1988년 설치된 이래 30년 동안 입법자들의 오류를 시정하고 공권력이 침해한 국민들의 권리를 되찾아 줬다. 그 덕분에 우리는 국가권력이 무소불위가 아니며 감시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학습했다. 문제는 모든 영양제에 부작용이 있다는 것이다. 

 헌법재판의 과도한 확장은 민주주의의 자발적 진보를 가로막는다. 헌법재판이 정의의 이름으로 행하는 입법통제는 권위에 대한 도전과  파괴에서 오는 통쾌함을 선사한다. 그러한 통쾌함은 달다. 하지만 그 달콤함은 과연 건강한 것인가?

 민주적 의미의 정의는 결국 국민의 의지이고 그것을 대변할 수 있는 것은 정당한 대의자들 뿐이다. 그런데 헌법재판관들은 국민이 뽑는 것이 아니므로 정당한 대의자가 아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행하는 정의는 과연 우리의 의지와 언제나 일치하는 것인가?

 본래 민주주의는 느린 것이므로 민주적인 국가작용에서 통쾌함이란 있을 수 없다. 통쾌함은 절차와 형식을 파괴할 때 나오는 것이다. 통쾌함을 쉽게 느낄수록 사회는 민주주의에서 멀어진다. 지루한 공방이 계속되는 현대적 재판보다는 사또 혼자 판검사와 변호사 역할을 수행하는 조선시대 원님재판이, 원님재판보다는 심문도 없이 반동분자라는 손가락질 한 번에 즉결처분까지 이루어지는 인민재판이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더 통쾌한 법이다.

 위헌적 법률을 수정하는 전통적인 방법은 국민이 직접 법률의 위헌성을 인지하고 개정 필요성에 대해 사회적 합의를 형성한 후 그러한 민의를 투표에 반영시켜 새로운 국회를 구성하는 것이다. 그렇게 구성된 국회는 또 다시 토론을 거쳐 합의된 바에 따라 개정을 단행한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은 너무 긴 시간과 까다로운 절차를 요구한다. 그러한 절차를 모두 무시할 수 있는 게 바로 헌법재판이다. 따라서 헌법재판은 민주주의와 충돌할 수밖에 없다.


안개 속에 감춰진 것

 이러한 헌법재판의 파격적이고 즉각적인 정의 실현은 달콤하다. 반면 전통적 방식의 공론화와 합의의 과정은 쓰다. 따라서 헌법재판을 통한 문제 해결이 일상화될수록 사람들은 더 이상 전통적 방식에 의한 입법 정상화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되며, 나아가 의도적으로 이를 거부하게 된다. 어느 순간 안개 속으로 들어가 앞을 볼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헌법재판의 성과와 필요성은 의심할 수 없다. 그러나 헌법재판은 민주주의가 정착할수록 조금씩 그 역할을 줄여가는 것이 합당하다. 여기서 역할을 줄인다는 것은 조직의 규모나 권위를 줄여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국가조직 차원에서의 권력분립과 사법작용의 한계를 준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시민의식이 성장할수록 헌법재판의 빈도는 늘어날 것이며, 그에 따라 헌법재판소의 예산이나 사회적 지위가 상승하는 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행정의 재량을 더욱 존중하고, 규범통제는 더욱 신중해져야 하며, 대법원을 정점으로 하는 사법권의 영역을 침범하지 말아야 한다.

 아쉽게도 헌법재판소가 그동안 보여준 행보는 정반대이다. 헌법재판소는 헌법과 헌법재판소법에 전혀 근거가 없는 독자적인 주문형식을 만들어냈고 행정의 전문성이 요구되는 영역에도 희대의 만능열쇠 "비례성 원칙"을 들이대며 가차없이 위헌을 선언했다. 특히 헌법재판소가 만들어낸 한정위헌이라는 결정형식은 입법작용에 대한 심각한 침해를 야기한다. 입법자가 "A 또는 B이면 C이다" 라고 규정한 법률이 위헌이라고 치자. 이 경우 헌법과 헌법재판소법에 의하면, 헌법재판소는 오로지 "위헌결정"을 할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헌법재판소는 스스로 "'A이면 C이다'라고 해석하는 한 위헌"이라는 형식의 결정이 가능하다고 선언한다. 헌법재판소는 이러한 변형결정이 법률을 최대한 합헌으로 해석하여 입법재량을 존중하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오히려 입법자의 의도에 반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이러한 한정위헌결정은 결국 헌법재판소가 원래의 법률을 폐기하고 "B이면 C이다" 라는 입법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이는 재판에 의한 정의실현에 과도하게 집착한 결과이다. 정의로운 것은 재판이 아니라 법률이어야 한다. 재판은 민주적 정당성이 없고 단지 민주적으로 제정된 법률을 적용하는 과정에 불과하다. 

 헌법재판이 그동안 덜 자란 시민의식을 이끌어가는 영양제의 역할을 해온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 역할을 내려놓을 때가 됐다. 헌법재판은 정말 몸이 아플 때에만 먹는 치료제가 되어야 한다.

지하주차장의 매미 수필

어느 늦은 밤 귀가길의 지하주차장에서였다.

차 문을 닫고 출구쪽으로 걸어가는데, 등 뒤에서 푸드득 소리가 나더니 엄지손가락만 한 매미가 앞질러 날아갔다. 매미는 오래 날지 못하고 금새 자동차들 사이로 사라졌다.

나는 근처를 기웃거리며 그를 찾아보았다.

길어봤자 며칠인 목숨인데 가능하면 풀과 짝이 있는 바깥으로 내보내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날개소리가 무색하게 추락하듯 땅으로 떨어지던 그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맥없고 안타깝게 느껴지도 했다.

자동차 사이를 이리저리 살피다가 가만 생각해 보니 괜한 짓인 것 같았다.

7년을 땅속에서 보낸 매미에게 허락되는 지상에서의 며칠은 기나긴 인고의 세월에 비해 너무도 짧은 영광으로 보인다. 그래서 매미는 때로는 인생무상과 덧없음의 상징으로, 때로는 우렁차게 유한한 삶을 노래하는 비장함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그건 인간의 관점일 뿐이다. 정작 매매의 입장에서는 삶의 마지막 일주일이 반드시 영광의 순간만은 아닐 것이다. 잡아먹힐 염려 없이 땅속에서 편하게 나무뿌리를 빨아먹으며 지내다가 어른으로서 할일을 다하기 위해 천적들이 우글거리는 땅 위로 나갈 때, 오히려 그들은 인생 최대의 시련을 겪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갈 때 두려움보다 설렘이 큰 것은 아직 젊기 때문이다. 그런데 땅 위로 올라온 매미는 이미 삶의 9할 이상을 다 보낸 말년이다. 심지어 다 죽어가는 판에 짝짓기를 해서 후사를 남길 임무가 남아있다. 천장의 흙을 쪼면서 새어들어오는 햇볕에 눈쌀을 찌푸리고 있는 매미는 아마도 행복한 방학을 보내다가 미루고 미룬 숙제를 시작해야만 하는 개학 전날의 심정일 것이다. 심지어 초등학생도 아닌 노인대학 최고령자인 상태.

지하주차장에서 서성이던 나는 곧 가벼운 마음으로 그곳을 떠났다. 세상 밖으로 나온 매미는 사실 별 탈없이 땅 속에서 천수를 거의 다 누린 녀석들일 텐데, 굳이 연민을 할 필요는 없겠지.

어쩌면 어두컴컴한 지하주차장 구석에서 행복했던 땅속에서의 지난날을 떠올리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남은 생을 마무리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코난 오브라이언 - 냉소와 유머 수필


유명 코미디언이자 사회자 코난 오브라이언은 미국 최고의 심야 토크쇼인 "투나잇쇼"에서 하차하던 날 애청자들에게 마지막 메시지를 전달했다. 아래는 그 마지막 부분이다.

*

All I ask is one thing, and I'm asking this particularly of young people that watch:

Please do not be cynical. I hate cynicism. For the record, it's my least favorite quality, it doesn't lead anywhere.

Nobody in life gets exactly what they thought they were going to get. But if you work really hard and you're kind, amazing things will happen. I'm telling you, amazing things will happen. I'm telling you, it's just true!

마지막으로 당부하고 싶은 게 하나 있습니다. 특히 젊은이들에게 부탁드리는데,

매사에 냉소적이지 말아주세요. 저는 냉소적인 태도를 정말 싫어합니다. 진심으로 제가 기피하는 성격이에요. 냉소로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인생이 언제나 순탄치만은 않겠죠. 하지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면서 따듯한 마음씨를 갖는다면, 여러분께 분명 놀라운 행복이 찾아올 거예요. 정말이에요!

*

처음에는 이런 갑작스러운 냉소주의 비판이 조금 생뚱맞게 느껴졌다. 정작 그 자신의 유머 스타일도 냉소로부터 썩 자유롭지 못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그는 현실주의에 기초한 유머를 구사해왔을뿐, 거기서 더 나아가 냉소로 빠져들지는 않았다.

현실주의자가 냉소를 거부하는 게 쉬운 일만은 아니다. 감정의 과잉을 절제하고 근거없는 낙관과 지나친 이상론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현실주의와 냉소주의는 상당부분 공통점을 갖는다. 이 두 부류에 속한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똑같은 안경을 쓰고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안경 아래로 비웃음을 띠고 있는지 여부가 바로 두 부류의 결정적인 차이점이다.

냉소의 본질은 비웃음이다. 현실주의에 기초한 투박하고 까칠한 유머에 비웃음이 섞이기 시작하는 순간, 유머는 더 이상 순수함을 지키지 못하고 악의를 품게 된다. 모든 종류의 비웃음은 해학의 영역이 아니며, 소통에 대한 포기의 선언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냉소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it doesn't lead anywhere.)는 코난의 말은 참으로 진실이 아닐 수 없다.

현실주의에 기초한 유머야말로 강렬한 효과를 발휘하는데, 이러한 유머는 현실주의와 맞닿아 있는 냉소와 종종 혼동되곤 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 둘을 구분해야만 한다. 솔직하고 날카로운 유머를 구사하면서도 무의미한 비웃음의 유혹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힘이야말로 인간이 발휘할 수 있는 가장 진보된 형태의 지적 능력이 아닐까. 코난이 언급한 "Kind(ness)", 즉 인간에 대한 애정과 따듯한 마음씨가 바로 그러한 힘의 원동력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2016년 8월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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